무언가를 알아가는 첫 단계

마케터, 목수, 자영업자, 출판인, 작가, 디자이너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하나만 파는 Digging 사람들과 인터뷰했습니다.
하나만 파는 사람들은 어떻게 문구를 사용할까요?
그리고 무엇을 느끼고, 경험할까요?

류윤하님은 ‘목수’입니다. 스탠다드에이에서 나무를 깎아 가구를 만듭니다. 갈수록 손에 펜을 쥐고 있는 시간 보다는, 타자기와 마우스를 누르는 시간이 많아집니다.캐드 (도면 프로그램) 로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컴퓨터와 모바일을 오가며 일정을 관리하는 게 익숙해집니다. 이번 전시에 참여를 결정하면서 윤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저는 지난 7년 동안 노트 1권을 다 못 채웠습니다.’ 쓰는 사람 윤하님에게 디깅노트를 썼던 100일 동안의 시간은 어땠을까요.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윤하님에게 쓴다는 것 Writting 은 어떤 일인가요?


고3때도 노트 필기를 안 했어요.

아마 중학교부터. 수업시간에 받아 쓰려면 엄청 빨리 써야 하잖아요? 워낙에 글자를 날려 써서 저조차도 제가 적어 놓은 필기 내용을 못 알아봤어요. 악필이기도하고. 그래서 반에서 노트 필기를 제일 잘 하는 친구에게 모든 물적 자원을 아끼지 않았죠. ‘네 노트를 복사하겠다. 그럼 나는 너에게 빵과 점심을 제공하겠다.’ 하는 우린 일종의 공생 관계였어요.ㅎㅎ

그치만 고3이 되니 불안해지더라고요. 필기를 이렇게 안 하고 대학을 갈 수 있을까? 하고요. 그래서 드디어 고3 때 딱 한 번 노트를 써봤어요. 바로 ‘오답노트’. 전과목에서 틀렸던 문제가 다 들어있는 단 한 권의 노트. 수업시간에 실시간으로 필기하는 건 무리지만, 오답노트는 혼자 있을때 쫓기지 않고 편안하게 쓸 수 있잖아요. 평생 한 권 다 써본 노트, 제 고3시절 오답노트입니다.


디깅노트, 거대 포스트잇이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현재 스탠다드에이는 죽전 제작소와 서교동 쇼룸, 이렇게 두 공간이 있습니다. 디깅노트에 적은 내용들은 서교동에서 일어난 일들이 대부분 입니다. 90% 이상 서교동 사무실에서 썼어요. (디깅노트를 소개하는 유리벽 너머의 공간입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내용만 적었어요. 평소같았다면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기록할 내용들을이 노트에 썼어요. 대단한 고민이나 성찰이 들어 있진 않습니다. 오늘 할 일과 내일 할 일은 정도를 적고, 오늘과 내일을 급하게 막는(?) 정도의 메모를 노트에 썼습니다.

보통 포스트잇은 오래 보관하지 않잖아요. 근데 노트는 쓴 내용들이 남아 있어서 지나간 일들을 찾아보기 편하더라구요. 얼마 전에 고객분이 가구 크기를 변경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는데, 그 수치 자료가 엑셀에 있어야 했거든요? 근데 그 날은 희한하게도 없었죠. 아주 잠시 당황했지만, 일전에 통화하며 쓱쓱 적어둔 수치들이 다행히도 이 노트에 남아 있어서 무사히 응대할 수 있었어요.


성격이 급해서 글씨를 정말 못써요.

습관적으로 글자의 획을 생략하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어 ‘프’ 을 쓰면 ㅍ(피읖)을 쓰면서 밑줄을 그엇으니까 받침인 ㅡ(으) 를 안 쓰고요. 써놓은 글자들을 보면 받침이나 선 하나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급하게 적어서 그런지 힘을 안들이고 날려쓴다고 해야할까요. 그래서 잉크가 진한 펜을 선호해요. 그런데 진한 필기구를 쓰다보면, 종이 뒷면에 비침이랑 자국이 생기잖이요. 그래서 이렇게 노트 한 쪽면에만 쓰게되더라고요. 여담이지만 유전자 때문인지 제 딸도 글씨 쓰기 숙제를 제일 싫어하더라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에 스케치는 해야 돼요.


글씨도 못 쓰지만, 제가 그림도 잘 못그립니다. 특히 스케치는 선과 선이 아름답게 만나야 보기 좋거든요. 그런데 제 선들은 왜인지 서로 잘 안 만나요.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오히려 겹쳐지고 안 만나니까 좀 항상 지저분해보여요. 그래서 개체끼리 대개 떨어져 있고 안 깨끗해요. (소소문구가 보기엔 그저 멋있습니다.)

디자인 할 때는 캐드를 활용합니다. 캐드로 옮기기 전엔 최소한의 아이디어 스케치만 하고요. 제가 알아볼 수 있게만 스케치하고, 그걸 가지고 컴퓨터로 옮겨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해요. 컴퓨터로 본 작업을 하지만, 그렇다고 스케치를 안 할 수는 없어요. 가구 디자인, 제작을 컴퓨터만 가지고 바로 시작하는 건 무리가 있어요. 손으로 안 그려보면 모른달까. 그럴 때 있잖아요. 내 머릿속에서는 ‘아, 이건 진짜 천재적인 디자인이야, 이런 아이디어가 생각나다니.’ 하는. 근데 막상 그 좋았던 디자인을 손으로 종이 위에 1차로 그려보면, ‘음….?’ 다른걸 확인할 수 있죠. 그래도 혹시 몰라 캐드로 옮겨보면 ‘아…아니었구나.’ 하죠.

저의 경우 이런 단계로 디자인, 아이디어들이 걸러지고, 계속 다듬어집니다. 손으로 그려보지 않으면, 좋은지 아닌지 잘 안보입니다. 모르는 상태로 있는거죠. 어쩌면 종이에 쓰고, 그리는 일은 무언가를 알아가는 첫 단계일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