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의 책가도

여기저기 쌓인 서책들과 양초, 화병, 서예붓, 그리고 그 속의 소소문구 제품들. 어딘가 옛 그림 같으면서도, 지금 내 방 같기도 한 알쏭달쏭한 그림. 소소문구 홈페이지 상단의 그림을 혹시 눈 여겨 본 적 있으신가요? 


바로 책가도(冊架圖)라는 민화의 양식에서 모티프를 얻어 그린 그림입니다. 책가도란, 책, 벼루,붓 등을 비롯한 문방구류를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책장과 서책, 그리고 우리가 익히 들어 본 문방사우가 주 소재이지요. 조선시대 문인들의 방을 상상해 보면, 어떤 그림인지 더 와닿을까요? 책가도는 동아시아에서 널리 쓰인 소재이지만, 특히나 한국에서는 시대에 따라 변용될 정도로 즐겨 그렸습니다. 

먼 이야기 같은 이 옛 그림이 어째서 소소문구의 모티프가 된 것일까요? 소소문구 홈페이지의 대문을 장식할 정도면, 분명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있을 듯 합니다. 그 이유를 소소문구 유지현 디자이너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림. 책가도 속에 자리한 소소문구 drawn by 유지현 디자이너 



▎ '내'가 여행한 나라, 일본 

학부시절 전공 수업의 첫 과제는 항상 ’나’였습니다. 당시 그 주제에 대해 불만이 있었어요. 조금 무책임하고 게으른 주제라고 생각했죠. 고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있어 보이는' 주제를 던진다고요. (그러면서 저는 ‘있어 보이는’ 교양수업, ‘철학’을 좋다고 듣고 다녔지요.) 불만 있어도 어떡하겠어요. 하면 뭐라도 되어있겠지 하고 나름 ‘나’를 열심히 팠습니다.

학부 시절은 '나라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단순한 것부터요. 내가 좋아하는 것, 싫은 것, 잘하는 것, 나랑 관련된 것들을 무작정 모으고, 경험했습니다. 나라는 세계 안에는 부모, 형제, 친구, 학교, 서교동, 마포구, 서울, 한국, 동아시아, 가장 넓게는 이 우주까지 포함됩니다. 이 물리적인 확장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와 우주의 관련성, 나의 바탕이 되는 곳 한국, 내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서교동이라서요.  

나에 대해 한참 심취해 있던 시절, 일본에서 1개월을 지냅니다. 그곳엔 기존의 나와 관련된 경험이 있기도 했고요 ㅡ 머리색이 검은 사람들이 많다. 젓가락을 쓴다. 등. 나와 완전히 관련 없는 것들도 경험합니다. 바로 전세계에서 문구stationery 를 가장 잘 만들어내는 곳이라는 것었습니다. 경험은 질문을 만들어 냅니다. 짧든 길든, 얕든 깊든, 그 질문에 답을 내는 순간 부터, 그 세계에 고개를 돌립니다. 그 세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요. 그 세계에 요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합니다. 그 때의 제 질문들은 대략 이랬습니다. 



  💡 1. '내가 여행 온 이 곳, 일본은 왜 문구를 잘 만들까?'

  💡 2. '나의 나라는 문구를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

  💡 3. '나는 어떻게 하면 문구를 잘 만들 수 있을까?'

 










▎나의 나라, 한국의 문구


문구 세계에 대한 질문과 답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세계 안에 있는 소소문구와, 소소문구를 쓰는 사람들에게도 물음 천지였지요. 어디를 가든지 문구를 생각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문구가 가장 우선이고요.



‘문방도구에 사치를 부리는 것만은 부릴수록 고아하다.’
ㅡ 유만주 <흠영>


3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읽은 글귀입니다. 조신시대 문인, 유만주는 13년간 매일 일기를 씁니다. 1774년 겨울에 친구 임로와 함께 경전을 공부하며, 찬록(학문이나 문예 따위의 글을 짓거나 골라 모아서 기록함.) 의 방식 가운데 일기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기 쓰기 시작합니다. 그 일기의 제목은 <흠영>인데요.  ‘꽃송이와 같은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흠모한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13년간 매일 일기를 쓰셨으니, 종이, 공책, 먹, 붓 등 그에게 문구는 뜻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도구였을 것입니다.  

문구 文具’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의 문구 세계’로 고개를 돌립니다. 그리고, 발견했습니다. 200년 넘도록 우리의 곁에 있는 문구의 모습을요. 바로 책가도(우리말로 책거리(冊巨里))에서요. (참고 링크)

책가도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구도, 색깔, 장안에 채워진 내용들이 바뀝니다.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지요.  200년이 넘도록 우리의 책장에 자리한 문구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오침안정법(책의 등쪽에 다섯 개의 구멍을 뚫고 실로 꿰매는 전통 제본 방식)으로 투박하게 엮인 거친 한지로된 공책에서부터 세심하게 잘 재단되어 금빛으로 감싸진 소소문구의 디깅노트까지. 쓰는 사람의 뜻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도구로서 문구는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끝)